2010.03.31 수 18:04
유리 눈알
그 날도 우중충한 하늘에선 희뿌연 안개와 함께
여우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반 지하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보초를 서던 당번병이 군화 뒷굽을 부딪혀 소리를 내며
오른손을 추켜올려 경례를 했다.
"하일, 히틀러!"
"하일. 히틀러."
그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비에 젖어 번들번들한
검은 가죽 장갑에서 맨손을 재빨리 잡아 뺐다.
그리고는 한쪽 어깨를 기울여 빗물이 뚝뚝 흐르는
검정색 장교코트를 벗어 다른 병사에게로 넘겨주었다.
"본부로부터 내려온 특이사항 없나?"
막사 안에 있던 병사의 대답은 짧았다.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병사들이 볼 수 없도록 입을 다문 채 이를 악물었다.
막사 천장에 달린 등은 너무 희미해서 바로 아래가 아니면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구석진 곳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축축하고 더러운 외지에 처박혀서 언제까지 병사들을 풀어
수색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젊고 기운 센 병사들은 얼마 전 사령부에서 싹싹 긁어모아
최전방으로 끌고 가버린 참이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너무 늙거나 어린 병사들과 그들만큼이나
낡은 화기, 장비들이 전부였다.
허탈과 분노로 잠시 멍해져 있던 그에게 한 병사가 다가왔다.
"하일, 히틀러. 대위님 방금 전에 수색조가 복귀했습니다."
"보고."
"맞은편 산 너머에 작은 마을이 있었답니다. 거기서 포로 몇 명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교전은 없었고, 사상자도 없었습니다."
"유태인인가?"
단단한 나무의자에 걸터앉은 그는 차려 자세로 꼿꼿하게 서서
자신에게 보고를 하고 있는 병사를 올려다보았다.
철모의 곡선 아래 그림자에 가려 그의 눈동자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그는 팔꿈치를 허벅지에 괸 손으로 미간을 쓰다듬었다.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병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서 다 잡아냈다고 생각했는데,
국경으로 빠져나갈 요량으로 여태 숨어다녔던 모양이다.
"몇 명인가……."
"여섯입니다."
"가족이겠군?"
"맞습니다. 전부 한 식굽니다."
"노인이 몇이지? 둘?"
"맞습니다."
대충 짐작이 간다.
늙은 노모를 모시는 부부와 그의 어린 자식들이거나,
부모와 형제, 두 명 중 하나의 가족들 일 것이다.
"취조하겠다."
그가 미간을 누른 채 말하자, 보고하던 병사가 경례를 다시 하더니
곧장 밖으로 나갔다.
"수색조는 쉬라고 하게."
그는 군화 뒷굽을 땅 치는 보초를 뒤로 한 채 다시 막사를 나섰다.
* * *
그는 허리춤에 꽂혀있는 루거를 뽑아 뒷부분의 슬라이더를
잡아 당겼다. 짤깍 소리와 함께 장전된 누런 총알들이 보였다.
두 발을 썼으니 여덟 발이 남았을 것이다.
그는 안전장치를 풀어 다시 권총집에 놈을 집어넣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 남자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었다.
거뭇거뭇한 턱 수염에 우뚝한 콧날 위로 약간 처진 푸른 눈이
전형적인 유태인의 얼굴이었다.
"폴란드어를 할 줄 아나?"
그가 폴란드 말로 물었다.
그 사내는 잘 못들은 것 같았다.
"폴란드 말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좀 더 명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
사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폴란드어를 모르는 모양이다.
"그럼, 독일에서 왔겠군?"
그가 이번엔 독일어로 물었다. 사내는 눈을 감았다.
"그렇소."
"여기로 어떻게 왔나?"
"……."
"독일에서부터 도와줬던 놈들을 대라."
"……."
"뇌물 받은 자, 사례를 베푼 자, 음식을 내어준 자……. 전부 다 불어라.
여기까지 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군."
사내가 눈을 떴다.
그의 눈썹 아래로 조명으로 인해 짙게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가 늘어졌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속에서도 푸른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느꼈다.
"당신을 알고 있소."
사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수염이 좀 덥수룩할 뿐, 그렇게 나이가 들어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피식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표정을 일그러뜨려 감췄다.
"무슨 소리냐."
"우리를 잡으면 항상 질문을 한다지? 당신의 한 쪽 가짜 눈알과 진짜 눈알을 구분해 내라고, 정답은 아무도 모르고……."
오른손을 옮겨 허리춤에 가져다 댔다. 루거의 강철로 된 끝부분이
손끝에 느껴졌다.
"왜 모른다고 생각하나?"
더 이상 미소를 감출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모두 죽이니까."
사내는 단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두려움도 없었다.
그는 마침내 루거를 뽑아들었다.
녀석이 어서 방아쇠를 당기라고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아니, 틀렸기 때문이지."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제는 사내의 눈동자가 더 잘 보였다.
"내 문제를 맞힌 자가 없었거든, 불행하게도."
권총을 탁자 위로 끌어올려 사내를 겨누었다. 그의 두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문제를 내겠다."
그는 자신의 짧은 앞머리를 정리해서 그림자가 생기지 않도록 했다.
"내 두 눈알 중 하나는 유리눈알이야. 화약이 튀었지.
의사가 그러더군, 유리눈알이 더 편할 거라고."
편하게 눈을 떴다.
유명한 유리 세공가가 만든 가볍고 비싼 의안이다.
지금까지 그의 루거는 오늘과 같이 수십 번이 넘게 질문의 던졌고,
틀린 대답을 한 자들을 모두 죽였다.
"문제는 간단하다. 내 두 눈알 중 가짜 눈알을 찾아내면 된다."
정답을 맞힌 자는 여태껏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우스웠다.
멍청한 유태인들 같으니라고, 동전의 앞과 뒤 둘 중 하나를 고르면
되는 것과 같은 확률이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틀린 대답을 했다.
쉬운 문제였다. 둘 중 하나만 고르면 되는 심심풀이 게임.
사실, 그는 유태인들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자신의 두 패를 전부 다 보여주고, 그들은 그저 하나만
고르면 되는 것이다.
루거는 벌써 수십 번이 넘게 불을 뿜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반지하에 자리 잡은 이 벙커는 그가 직접 취조용으로 개조한 것이다.
기본 구조는 철저하게 국방군 벙커 건설 규격에 일치했지만 그는
안쪽에 벽을 조금 덧대어 방음이 철저하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창문도 막아버리고 대신 환기구를 설치해 두었다.
빛도 공기도 소리조차 철저하게 걸러져 들어오는 그만의 공간이다.
진절머리 나는 그의 일상에서 유일한 여흥이었다.
짧은 여흥.
사내가 긴장하는 것이 보인다.
이마와 코에는 땀방울이 맺혀 뚝뚝 떨어진다.
수염에는 수분과 염분이 번들번들 조명에 빛난다.
목덜미가 움직인다. 마른 침을 삼킨 것이다.
그는 눈을 똑바로 뜨고 사내의 시선을 응시한다.
그의 앞에 앉았던 자들은 이 순간이 오면 여러 가지 행동을 보였다.
두려워하거나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질렀다.
사내의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졌다.
높지는 않지만 거친 숨소리가 벙커 안 취조실을 가득 채웠다.
숨소리는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심장마비로 먼저 죽기라도 하면 재미가 없는데,
그는 피식 웃었다.
유태인들의 행동은 전부 제각각이었지만 대답은 항상 같았다.
틀린 대답.
결과도 항상 같다.
죽음.
대답은 빨리 나올 것이다.
답답한 공기, 수직으로 내리 찍는 조명, 주시하는 총구,
살 수 있다는 기대감.
취조실 안의 모든 것이 상대의 대답을 요구하도록 설계됐다.
대답해라, 틀린 답을.
사내는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이런 자는 처음이다.
땅으로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짧은 한숨을 쉰다.
"그 쪽 눈이 가짜로군."
사내가 고개를 들어 턱으로 한 쪽 방향을 긁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정답이었다.
수십 명의 시체 위에 단 한사람의 생존자가 탄생한 것이다.
루거가 다시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틀렸다고 하고 죽이면 된다, 간단하다.
손가락만 움직이면 된다. 아무것도 아니다 유태인 하나는.
그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행동을 해야 한다. 빨리. 당기던지 내리던지.
유태인의 표정은 이제 평안하다. 심지어 미소까지 짓는 듯하다.
그는 루거를 든 팔을 살짝 올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땀방울을
옷깃에 닦았다.
사내는 가만히 있었다.
그는 다른 손을 들어 루거의 장전을 풀고 안전장치를 올린다음
권총을 내려놓았다.
"정답이군."
그는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그는 알 수 있었을까?
대답을 들어야한다. 의문에는 반드시 답을 내야한다. 그가 군인으로
살면서 배운 교훈이자, 결정한 삶의 모토였다.
"어떻게 알았나?"
"내가 대답해야 하오?"
"그렇다."
그는 권총을 다시 집어 들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유태인은 가만히 있었다.
"대답해주게."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어떤 위협적인 행동이나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
유태인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간단하지.
그 쪽 눈이 더 인간다워 보였기 때문이오."
그는 무표정하게 얘기를 들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알 수 없었다.
화를 내서는 안 되고, 웃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조롱 섞인 농담이지만 사내는 어쨌든 답을 맞혔다.
그는 루거를 권총집에 넣었다. 그리고 서서히 일어나 강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복도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하일, 히틀러."
당번병이 경례를 붙였다.
그는 옷걸이에 걸려있던 장교모와 코트를 챙기며 말했다.
"감방으로 되돌려 보냈다가, 밤이 되면 풀어주게."
"예?"
당번병이 석고상처럼 굳어지며 되물었다.
"빵을 두 배로 주고, 밤이 되면 풀어줘라."
병사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있었다.
그는 무시하고 밖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랐다. 군화 밑창과 단단한
콘크리트 계단이 땅땅 소리를 내며 귀를 두드렸다.
또 하나의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날이 맑았다.
근처 숲에서 새 울음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하일, 히틀러!"
쉬고 있던 병사들이 그를 보고는 벌떡벌떡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그는 답례하지 않았다. 추켜올려진 병사들의 오른손이 자신을 따라
회전하는 것이 힐끗 보였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이 있는 벙커에 도착했다.
축축한 군화 바닥을 털 수 있도록 철사망이 바닥에 깔려있었지만
그는 털지 않고 그냥 걸어 들어갔다.
항상 철문을 잠갔지만, 잠그지 않고 닫기만 했다.
나무로 된 익숙한 책상과 책장, 캐비닛이 보였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다. 그는 코트를 벗어 의자 뒤에 걸었다.
그 위에 앉자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장교모를 벗어 책상 위에 놓았다.
눈을 감고 유리눈알이 박혀있는 눈꺼풀 위를 쓰다듬어 보았다.
허리춤 권총집에서 루거를 빼들었다.
안전장치를 풀고 장전을 다시 한 다음 총구를 돌려 입에 물었다.
뜨겁고 꺼끌꺼끌 한 입천장에 차갑고 맨드러운 총구가 닿았다.
그는 침을 한 번 삼켰다.
루거가 손가락을 간지럽히자 이번에는 움직여 주었다.
집무실 천장에 피가 튀기는 것이 보였다.
-끝-
유리눈알/2차세계대전/소설
본 포스팅은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구독이 가능합니다.:
'자작 노블(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일기-핵전쟁 이후의 소련 잠수함 부대와 아이들 이야기 (0) | 2020.03.10 |
---|---|
SF설정-의지장갑(Will Armor, Armor Of the Will)과 대의지장갑(Anti-WA)용 무기의 발달 (0) | 2019.11.04 |
Ψ~지옥기사 설화집~Ψ -5- [시체백작-2](성인용동화, 잔혹동화) (0) | 2019.06.15 |
Ψ~지옥기사 설화집~Ψ -5- [시체백작-1](성인용동화, 잔혹동화) (0) | 2019.05.14 |
자작 노블 시나리오 전쟁/밀리터리/정치 : Parallel World War I (제 1 차 평행 세계 대전) (0) | 2019.03.06 |
댓글